(13편) 클라식 음악의 고향, 축제의 땅... 빈.
가끔씩 느끼죠(?). 누구나(!).
...산다는 건, 떠남과 돌아옴의 연속으로 이행 되는 게 아닐까 하는 기분 말인데요. 결국 이별과 만남의 끝없는 반복입니다...
바꿔 말하자면 삶이란 비움과 채움의 되풀일 뿐 아닌가 하는 생각이구요.
더우기 그래서 배우게 되지요.
격렬한 삶일수록 여행을 통해서 영양되고 성장한다는 사실 역시...
미지未地 로의 여행.
그 모험을 통해 떠날 때 절반 비워있던 가방이 (귀환길엔) 기대 못했던 새로움으로 꽉 채워져 있음을 발견하는 식입니다.
그리고 비로써 그 사실에 감탄하고 열광하게 되는 것 아닙니까.
늦은 오후 우리는 바야흐로 클래식 음악의 고향, 축제와 환상의 도시 비엔나에 입성합니다.
~맞아요.
뭔가 우리 가방과 정신을 꽉 채워 줄 듯 한 기대감에 푹 젖은 상태로...
종이 한 장 바닥에 떨어져 있지 않은 청결함, 산뜻함... 감각 있는 장식과 디자인에서 빈 국제 공항(Flughafen Wien)은 비행장이라기보다 차라리 무슨 예술 갤러리를 연상케 했는데요...
네, 그것이 바로 비행장에서부터 우리의 모든 센스를 압도한 빈(Wien/비엔나)의 첫인상 아니었을까요.
마중 나온 차편으로 호텔까지는 약 30분 남짓 드라이브였구요.
그 사이 줄곳 느껴봅니다. 차창으로 접수되는 시내 역시 냉정할 정도로 청결하고, 정숙하며 조용한 모습이었음을 말이죠.
빈의 모습에선 (중 유럽이라기보다는) 다소 동 유럽 고유의 분위기와 색깔, 차분함을 보았구요. 날카로울 정도로 인상적이었습니다.
아직 (많은) 세계인들 상상의 공간에만 갇혀 있는 도시입니다.
옛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수도... 650년 동안 유럽의 반토막을 호령하던 힘과 권력의 중심지였음에도 불구하고 말이죠.
세상 많은 이들의 일상, 그 부분이 돼버린 클라식 음악과 예술의 고향이라는 명예를 안고도, ...아무튼 빠리나 런던 같은 서-유럽 도시들에 비해 다소 멀게 느껴지던 도시가 빈 아니었을까요.
아무튼 앞으로 며칠, 환상과 베일에 가려져있던 그 영지를 밟으며 저는 다시 한 번 세상을 떠도는 (멋진) 나그네의 모습으로 변모합니다.
빈의 저녁 노을...
그리고 아침...
빈.., 되풀이해봅니다.
고요함, 규율discipline과 단련, 게르만 피?의 민족성, ...도시로써 바로 그것의 확실한 반영은 아닐까 느끼게 되는데요.
결국 그렇게 우리는 하이든, 모차르트와 베토벤, 브람스와 슈베르트, 바그너.., 그뿐인가, 스트라우스 家의 선율, 세계인들 모두에게 사랑받는 월츠가 푸른 다뉴브 강물과 함께 흐르는 도시. 아! 영화 Amadeus 의 무대죠. 바로 그 곳의 중심, 어느 호텔에서 짐을 풉니다.
고요함과 질서, 다운타운에 위치한 Park Ring 호텔역시 제외일리 없었는데요 -마침 요 대목에서 잠깐 호텔평 드립니다.
깨끗한 디자인, 잘 정돈 된 내부, 품격이죠, 클라스... 그리고 친절한 서비스.
어찌 보면 유럽에서 자주 만나는 스타일인데요.
오래된 (건축의) 고풍 외곽에 비해 다소 근대화된 인테리어의 만남 말입니다. 암튼 여행자 편의에 초점 맞춘 세밀한 배려에 감탄하며 편안한 객실에서 여장을 풀고, 객실 발코니에 앉아 짙은 어둠 속에 펼쳐지는 파노라믹 비유 빈의 야경에 도취돼 보는 식입니다.
바로 눈앞에 유명한 St Stephens 카테드랄이 상당히 높고 뾰쪽한 종탑과 함께 고딕 건축의 궁극을 과시합니다. 덤으로 따라온 즐거움이었구요...
본 기행문에 실린 여러 장의 사진이 객실 발코니에서 촬영됐을 정도로 도시의 분위기와 전망을 흠뻑 껴안을 수 있는 호텔이었구요. 나무랄데 없는 편안함이 제공되는 대가로 숙박료 만큼은 저렴하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열기있게 작업해서 얻는 돈, ...바로 이런 곳에 쓰기 위함 아닐까(?)" 식의 자기합리가 다소 필요로 되기도 했구요... 최종 평가는 5점 만점에 4.5 정도가 됩니다. 걸맞는 멋의 식당 정도는 있어야 했을 듯 한데 말이죠. 식당이나 와인 한 잔 마실 접대 시설의 결여, ...그 탓에 .5점은 삭감합니다.
빈에서의 두번째 날인데요, 서늘한 기후에 하늘은 가끔씩 비를 뿌려댑니다.
유럽의 옛 도시들이야말로 흐리고 비가 올 때 방문객들에게 더욱 짙은 낭만을 던져주는 듯 느끼게 되지요.
어떻든 그래서 사진 촬영에 애로가 있더라도 가끔씩 비오는 날을 선호하는 데요...
그렇습니다. 유럽의 낭만은 모름지기 고풍 건축들, 돌길, 전차.., 그리고 와인, 안개와 '비'가 만들어내지 않습니까(?).
긴 역사를 자부하는 유럽인들 아닙니까.
방문 때마다 느끼지만, 흥미로운 건 (건축물) 겉모습만큼은 옛것 보존에 심혈을 기우리지만 편의 사항을 위한 인테리어 만큼은 근대화된 활용/실용성에 고집한다는.
또 그러다보니 신식 디자인 선호 역시 그들의 취향이 된 듯싶다는 느낌입니다. 그렇습니다. 미국에 비해 -긴 역사를 보듬으면서도, 미래 지향에 차라리 앞장서는. 그러니까 전 세계 시장을 움직이는 신세대의 디자인과 패션 감각이 바로 그런 유럽인들의 멋과 완전성에서 도래되는 듯 싶기도 하구요.
유럽의 많은 도시들이 그렇듯, 빈에도 볼거리란 아주 많습니다.
빈은 예술 뿐 아니라 노상 카페 문화의 종주국이라고 할 만큼 도처에 가던 길을 멈추게 하는 카페들이 줄지어있는데요. 지난날 왕족, 귀족들은 물론 유명 예술가들이 찾아다니던 명성 있는 카페나 사교장들 역시 즐비하고 하지요.
오스트리아 사람들은 유난히 초콜릿과 빵을 즐겨 먹는다고 하는데요.
사실 짧은 시간에 강행군을 이행해야 했던 우리에게 예쁜 길목 카페나 빵집 스톱이 마음대로 돼주질 않은 점은 분명 아쉬움으로 남지만, ...살다보면 또 기회가(?) 하고 마음을 위로 합니다.
빈에서는 빠리나 로마와 달리 중국음식은 물론 한국 식당도 쉽게 만날 수 있다고 하네요. 길거리에서 파는 인스턴트 음식들도 퍽이나 좋다는 평입니다.
오후에 두어 시간 시티 투어를 통해 겉핥기로나마 유명한 Belvedere 궁(지금은 박물관입니다/아래 사진), 비엔나 필하모닉의 홈인 Musikverein Golden Hall 과 비엔나 오페라 하우스(세계 3대 오페라 극장 중 하나지요/윗 사진) 등을 카메라에 열심히 담으며 중얼거리게 됩니다.
‘맘껏 사랑하자(!) ..즐기자, 그리고 기억 속에 구겨 넣자. 시간이 많이 없으니까.’
방문 셋쨋 날. 숀부른 (Schonbrunn Palace) 왕궁
그러니까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을 대표했던 빈의 왕궁들 중 (Hofburg 왕궁이 합스부르크 왕조의 정궁이었다면) 사사로이 왕족들의 주거지는 바로 '여름 궁'으로 불렸던 숀부른 (Schonbrunn Palace) 궁전이었다고 하는데요.
유명했던 황후 마리아 테레지아 (1740-1780)의 바로 그 궁전은 프랑스의 베르사이 궁 못지않은 화려함으로 방문객들을 맞습니다.
참고로, 바로 마리아 테레지아 황후야말로 프랑스의 (루이 16세) 왕비였던, 그리고 혁명 시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진 마리 앙투아네트 (기억 나시죠. 전번 빠리 기행문과 베르사이 궁 방문)의 어머니였던 셈이구요.
암튼 빈은 물론 오스트리아를 제대로 이해하기엔 650년간 유럽의 절반 이상을 지배한 합스부르크 왕가의 역사를 이해해야 할 듯해서 말입니다. 저 또한 속성으로 유럽 중세기 전후의 역사 공부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윗 사진은 숀부른 (Schonbrunn Palace) 왕궁 뒷 정원의 전경이구요.
빈을 방문하는 이라면 반드시 찾아봐야 하는 곳 아닐까요. 즉, '비엔나 우드'의 메일린 성당이죠.
요 대목에서 양해 부탁드리며 (읽으시는 분들) 지루하지 않을 정도로 약간의 역사를 짚어봅니다.
그러니까 바로 이곳이 오스트리아 헝가리 제국 (합스부르크 왕가) 말기의 황제 (프란츠 조셉)와 엘리자베스 왕비, 그리고 비운의 아들 루돌프 황태자의 주검을 스토리 하는 곳인 탓에.
바로 얼마 전 서울에서도 인기를 끌었던 뮤지컬 '비운의 왕자 루돌프', 바로 그 스토리의 고향인 셈이지요. 본래는 황실의 사냥 별장이었던 곳을 (루돌프의 죽음 후) 아들 잃은 엘리자베스 왕비가 부모의 정신을 기리는 성당으로 재건하였다는 역사의 전달입니다. 하여 그 후 자식 잃은 어미들의 참배지로 거듭 태어나 전 유럽에서 많은 방문객을 받는다고 하지요.
(지루하셔도 잠깐만!!) 참아주시면 중세기 이후 유럽 역사의 가장 중요한 부분을 터득하시게 됩니다.
합스부르크 왕조는 루돌프 1세(1273)를 시작으로 카를 1세(1918)에 이르기까지 무려 645년 동안 유럽의 절반을 지배했던 왕가였지요. 마치 우리 조선 왕조처럼 합스부르크 家도 600여 년 동안 무수한 사건과 스토리를 만들었던 것인데, 특히 (왕조 말기에 이르러) 마리아 테레지아(Maria Theresia, 1717~1780) 부터 그의 자식, 손자에 이르기까지, 드라마틱하고 절묘한 실화들은 조선 실록의 파란만장을 다소 능가하기도 하는데요...
아무튼 황태자 루돌프의 비극적이며 파란만장한 스토리야말로 비엔나 우드 방문에 즈음하여 여러분들께 반드시 전달하고 픈 욕심에 간단히 시도해봅니다.
루돌프를 얘기하자면 그의 할머니인 마리아 테레지아로 (그러니까 위에 실은 숀부른 왕궁을 건설한 황후지요) 거슬러 올라가 시작해야 할 듯 싶은데요.
그녀는 카를 6세의 공주(장녀)로 (왕가의 규정을 깨고 연애결혼을 했다고 역사는 전합니다) 남편을 왕 (프란츠1세, 1708~1765)으로 만듭니다. 그러니까 요컨대 '킹-메이커'였던 셈이죠, ...그녀는.
그래도 섭정은 자신의 몫이었다고 하지요. 사실 탁월한 능력자이자 리더였던 그녀는 많은 정치와 전장의 성공적인 업적을 역사에 남기게 되는데요. 16명(5남 11녀)의 자식을 둔 사실 역시 유명합니다. 16명의 자녀 중 10명은 유럽 각국의 황제와 왕비가 됐음 또한 그녀의 외정술을 대변해주는 대목일 듯 싶구요. 신성 로마제국의 프란츠 2세, 벨기에의 왕 레오폴드 2세, 앞서 말한 프랑스 루이 16세의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가 그들 중 유명하구요.
아무튼 남편(프란츠 1세)이 죽자 그 뒤에 아들 프란츠 요세프(1830~1916)가 왕위를 계승하는데, 그의 장남이 바로 루돌프인 셈입니다. 루돌프는 어린 시절 늘 부모의 애정 결핍에 시달렸다고 합니다. 공무처리에 바뿐 아버지나 항상 여행 중이었던 어머니의 얼굴들은 볼 수도 없었고, 결국 할머니 손에 사랑 없이 길러집니다만, (예나 지금이나) 동서고금에 애정 결핍과 정서불안의 극치는 항상 비극적 결말을 동반했었나 봅니다.
결국 루돌프의 죽음은 왕가의 몰락과 때를 같이 하게 되는데, 요약해서 설명해보자면, 루돌프 황태자의 비애는 그의 원치 않은 정략결혼에서 시작된다고 역사는 전합니다.
그러니까 당시 루돌프는 22세였고 스테파니(황태자비)는 16세였다지요. 아무튼 사랑 없는 결혼의 불행은 이어졌고, 이들의 불화는 끝내 별거에 이르고 만 셈입니다.
아! 근데 이 무렵, 30세의 루돌프는 17살밖에 안된 천민賤民 출신 마리아 폰베체라를 소개받고 사랑하게 된다는 얘기입니다. 뜨거운 사랑이었지만, 결코 이뤄질 수 없는 현실이었지요. 당시 왕가에 이혼은 가능한 것이 아니었을 뿐더러, 마리아 폰베체라의 낮은 신분이 또 다른 이유일 수밖엔 없었다는 사실입니다. 아무튼 그 사건으로 그는 황태자 자격마저 박탈하고 마는데, 그러니까 1889년, 결국 루돌프는 마리아와 함께 바로 비에나 우드의 이 사냥용 별장 메일링 (Mayerling) 에서 동반자살을 이행하게 된다는 역사의 멜로 드라마 입니다.
암튼 이후 합스부르크 왕가는 서서히 멸망하고 맙니다.
프란즈 요세프 황제는 아들의 죽음 후에도 한동안 재위에 있었지만, 부인 엘리자베스는 스위스 여행 중에 총에 맞아 비명 횡사한 것으로 역사는 전합니다.
중요한 건 직후 마지막 황제로 지목된 조카 프란츠 페르디난트(1863~1914)는 아내와 함께 사라예보의 육군 훈련에 참관차 갔다가 피격을 받아 죽게 됩니다. 얘기가 이쯤 흐르면 많은 분들이 아시리라 믿습니다만, 구태여 보탠다면 말이죠. 우리가 아는 바로 세계 제일차 대전의 원인이 거기서 비롯된 셈 아니겠습니까.
말하나 마나죠. 성당 디테일이 기대했던만큼 아름답습니다.
며칠만 에 (12세기부터 19세기까지) 어언 650년 동안 유럽 절반을 통치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역사를 밟아보는 건 다소 벅찬 작업이었습니다. 번갯불에 콩 구워먹는 식의 방법이었지만, 다음을 기약하고 떠나올 수 있게 충분한 빈의 매력과 정보를 머릿속에 그리고 (제 기억 용량의 넘쳐흐름을 우려해서) 카메라에 담아두고...
네.., 또 한 번 유럽의 많은 것을 보고, 느끼고, 배운 후 남모를 흐뭇함에 빈을 떠나는 셈입니다.
땅거미가 내려앉은 빈의 모습, 황홀할 정도 아닙니까...
결론해 봅니다.
빈은 조용한 도시였습니다. 고딕과 바로크 스타일 건축물, 또프랑스 혁명이후 도래된 포스트 바로크와 이른바 아트 누보의 입김 역시... 그래서 근대화 되고 심플한 디자인과 예술의 전시입니다.
되풀이 하건대 유럽 여러 곳에서 느끼는 바대로 Old and New 의 근사한 혼합이 비엔나만의 색깔로 다시 한 번 강조되는 곳이기도 합니다. 동유럽 상징의 고딕 건물들.., 도처에 깔려있는 빨간 지붕들이 얼마전 방문시의 프라하를 떠올리게 했는데요. ...근데 뭔가 더 있었습니다. 분명...
요컨대 600년 이상 유럽 절반을 호령하던 기틀의 흔적, 대대로 천재 음악가들을 길러내고 양성 시킬 수 있었던 자연과 미美, 그리고 도시 곳곳에 흐르며 아직 살아 숨쉬는 정숙함과 단련의 기氣는 아니었을까요(?!)
...방문 즐거우셨나요(?)
남모를 흐뭇함에 흠뻑 젖어 (다음 방문지를 향해) 빈을 떠납니다. 기대에 어그러짐 없이 꽉 찬 가방과 정신을 끌어 안고 떠날 수 있는 건 여행자들에게 더 없는 행복이자 수확이니까요.
그래요. 그 것이 바로 채움이요, 삶 아니겠습니까.